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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God2009/01/14 21:25

복음으로 포장한 '성공주의'  
'언제 예수가 깨끗한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나?'
 

오늘날 교회의 강단은 보다 쉽고 보다 편하고 보다 재미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대중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심드렁해진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힘든 판국에 교회에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오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성공’'과 '부'가 가미되면 금상첨화다. 그러기에,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추종하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시장의 논리'란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다. 보다 많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말씀의 내용과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 부흥의 원리가 되고 있고, 성도(聖徒)라고 표현되는 교회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성서가 증언하는 '참된 복음'과는 한참 멀게 되었다.


▲ 욥기 8장 7절은 한국 교회 성장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욥 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막 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이 세 구절은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 성장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이 말씀을 듣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는 이러한 의욕의 무진장한 공급처였으며 그로써 한국 사회의 발전을 보다 힘 있게 지원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가난과 열등감과 목표 상실의 현실에서 풍요와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슬로건처럼 이 세 구절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 이해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힘겨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의 언어'로 신앙인들을 사로잡아왔다.  

기득권에 눈 먼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

믿음이 좋은 것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능력과 관련이 있고, 그로 해서 '성공'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가 되었다. 낙오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으며, 따라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서 능력을 얻어 현실에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의 정도와 내용이 높고 풍족할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존재로 인정되는 인식 체계를 한국 교회 안에 자라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목회자는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처럼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특권적 위계질서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적 위계질서는 정치·경제적인 특권과 연결되면서 한국 교회를 기득권 세력화했으며, 그 기득권의 방어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화시켜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체제가 추구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이러한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 자리가 없었으며, 오로지 세속적 능력과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으면 그로써 축복이 확인되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이며,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하지만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이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고 그로써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간과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적 타락과 경제적 붕괴 속에서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을 한 손에 거머쥘 방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짱'이다. 번영 신학 전파의 일등공신인 조엘 오스틴 목사.  
 
'세상의 저울'에서 맛보는 허탈한 인생의 무게

사실, 성공을 전제로 한 세상의 견해와 여론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외면적 가치 기준에 사로잡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실의 면모에 눈멀기 쉽다. 세상은 가진 것과 누리는 것과 쌓아올린 지위와 지식 그리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존재 여부로 판세를 읽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그것이 그 소유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잘난 인간과 못난 인간이 구별되고,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지며 존경과 멸시가 갈라진다. 이 기준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세(大勢)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내리는 결론이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저울'에 올라서서 자신의 인생과 현실의 무게를 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교만이나 열등감이 나오고, 허영이나 패배 의식이 나오며, 만용이나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실로 온통 이 저울에 수시로 자신을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래서 그 저울의 눈금이 자신의 무게를 얼마 만큼으로 표시하는가에 매달려, 기뻐하기도 하고 낙망하기도 하며, 뻐기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령 욕망의 달성을 성공으로 착각하고, 그 과정에서 황폐해진 인간성은 성공 이후 교만해지거나 타락한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욕망의 성취가 낳는 열매는 그런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생의 무게는 허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우리의 인생을 달아보아야 할 저울은 '하나님의 저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저울도 때로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을 달아볼 수 없으며, 또는 우주 전체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생명을 달아볼 수 없다. 마음의 진실을 달아볼 수 있는 저울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마음이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도, 이 세상의 가장 큰 것도 들어갈 수 있는 자리이다. 바로 그 '마음자리'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재는 저울을 어디에서 발견하겠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또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진실이 있는가에 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룬 듯해도 그것이 그 인간의 진실 됨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허사이다. 얼핏 보기에는 아직 미미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저울에서 참된 무게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의 인생을 달아 그로써 자신의 삶이 가진 가치와 진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큰 힘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진실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진정한 능력은 그로써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 복음으로 포장된 성공주의는 '청부론'과 '훌륭한 거부'라는 외피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  
 
청부론이란 외피 두른 포장된 성공주의

이제 복음으로 포장된 성공주의는 요즈음 '청부론'과 '훌륭한 거부'라는 외피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교회가 그런 일에 나서기보다는 오히려 당대의 주류에 들어설 것을 부추긴다.

권력을 쥔 '깨끗한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다. '깨끗한 부자'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잘 되어 간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을 것이다. 손가락질 받는 부자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을 한 손에 거머쥘 방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짱'이다. 양손의 떡이다.

게다가 믿음만 좋으면 그저 영적 성숙만이 아니라 물질적 형통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판국에 마다할 까닭이 없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뭐 문제인가, '잘 벌어서 잘 쓰면 되지'라는 주장,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는 '기복주의'라는 비난도 이렇게 면할 수 있다. 신앙과 물질이 모두 풍요하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태, 실로 '종교적 엑스터시'가 아니지 않는가.

주류가 되고 싶은 신자들이여…

한국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사회의 타락과 부패의 사슬에 관련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럽다. 목사와 장로들이 사회적 비리와 관련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교회의 장로는 과거의 꿋꿋하면서도 엄격한 모습의 경건한 신앙인의 모범적 모델에서부터, 어느새 '부'를 거머쥔 기업체의 이사 정도의 모습으로 그 종교적 이미지가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기존의 주류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하려는 것을 이른바 '성공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부추기는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하나님나라의 의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실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세속적 성공이 바로 성공이라는 착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모두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신앙에서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일에 있다. 그 열매로써 얻어지는 부는 참되다. 그것은 의로운 과정과 의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 한번 우리에게 훌륭한 거부, 깨끗한 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르친 바가 있던가?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문제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하도록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이의 길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부는 그를 진정 부유하게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겪는 빈곤 또한 그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고 사는 자에게 '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의와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그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한종호,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이 글은 <복음과상황> 1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뉴스앤조이 www.newsnjo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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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듣기로 중세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청교도의 지도자였던 칼뱅이
당시 신흥세력인 소상공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깨끗하게, 열심이 일해서 쌓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오늘날 개신교와 현세기복신앙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하던데,

정작 칼뱅은 혹독하리만치 엄격한 금욕주의적 도덕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깨끗한 부'라는 일종의 형용 모순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지만,
그런 안전판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깨끗한 부'의 기준은 사라지고,
오로지 '부는 존경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깨끗한 부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예외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 모든 법칙에 예외는 있으니.... -_-
Posted by 스톡데일
세상만사2009/01/02 12:10


예전에 어렸을 때 영어공부 하면서 읽은 예문들 중에,
이런 유머가 있었다.

아직 전화도 전보도 발명되기 전이었던 시절에,
어느 시골의 부잣집 도련님이 대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방학이 되서 집으로 돌아온 도련님은 기차역에서 하인의 마중을 받았다.

그동안 집에 별 일은 없었느냐는 도련님의 질문에 하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집에 고양이들이 다 죽었구만이유."

별일 없다는 말에 안심을 하면서 도련님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고양이들은 왜 죽었는데?"

"고기를 너무 먹어서 배가 터져서 죽었지유."

"누가 그렇게 고기를 많이 줬길래?"

"주긴 누가 줬남유. 말들이 다 죽어서 내다버린 걸 지들이 먹다가 죽은 거지유."

"뭐? 말들이 모두 죽었다고? 왜?"

"밤새 물을 긷다가 힘들어 지쳐서 죽은 거지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밤새 물을 긷다니?"

"집에 불이 나설랑유. 불을 끄느라 밤새 물을 실어다 날랐지유."

"뭐? 집에 불이 났다고? 어쩌다가?"

"그게, 마님 장례식 때 하녀 하나가 촛불을 잘못 쓰러뜨려서 집이 홀랑 타버렸지유."

"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도련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쏙 빼놓은 채 고양이 얘기만 하는 하인이야 그냥 웃어주면 그만이지만,
정작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 수를 자랑한다는 신문이 고양이 얘기만 한다면, 이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MBC는 앵커 멘트라는 형식을 빌려 이 '사건'을 보도했는데,
정작 조선일보는 '사건'은 쏙 빼놓고, 이 멘트를 '사건'으로 보도했다.
그나마 보도의 논조는 차치하고라도, 조선일보가 언제부터 미디어 오늘로 바뀐 것일까?

조선일보의 관심은 KBS가 현장 중계를 하면서 특정 목적에 맞춰서 현장 상황을 왜곡했다..는 건 전혀 뉴스 거리가 아니고,
오직 MBC가 이를 비난(?)했다는 것만이 뉴스 거리일까?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전자가 먼저 뉴스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후자는 고작해야 취재 후기 정도로나 언급되어야 마땅한 게 아닐까?

하기야
KBS가 이명박 정권에게 넘어가기 직전에 KBS 앞에서 정연주 사장 퇴진 반대 1인시위를 하던 한 아주머니를 수구 깡패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각목으로 폭행하다가, 그 소식을 듣고 몰려든 촛불시위대에게 역으로 포위되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촛불시위대가 잡아서 넘긴 폭행 주도 수구 깡패를 경찰이 풀어줘도,

애초에 수구 깡패들이 1인시위하던 아주머니를 폭행했다는 얘기는 쏙 빼놓은 채 밑도 끝도 없이 촛불시위대가 수구 깡패들을 폭행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써갈긴 조선일보인데,
새삼스럽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더 웃기는 일이겠지.... -_-;;

촛불집회는 1인시위를 해도 잡아가고,
수구깡패들은 각목으로 사람을 패도, 가스통을 들고 설쳐대도, 경찰의 보호를 받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걸 따지기 시작하면 불과 1년도 안 된 동안에 책 몇 권이 모자랄 지경인데, 올해는 또 몇 권이나 더 써야 하려나....


PS. 여담이지만,
정작 MBC는 왜 종로 보신각이 아닌 파주 임진각 타종행사를 중계한 건지,
한편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좀 개운치 않았다...
(혹시 모르겠다, 예전부터 MBC가 보신각이 아닌 임진각 중계가 전통이었는지.. -_- )



Posted by 스톡데일
펌글(추천)2008/12/05 18:26
조세희 "행복한가? 당신은 '도둑' 아니면 '바보'요"
"'난장이'는 바로 비정규직…가슴에 희망의 철기둥 박자"

    
3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스스로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여러분과 얘기하고 있다"는 그의 70년 가까운 삶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 30년간 이 땅은 빠른 속도로 변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보여주는 개발과 독재, 성장의 그늘은 시간상으로는 어쨌든 '오래 전'의 얘기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고 말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3일 늦은 저녁 서울 노원구 서울북구고용지원센터 대강당에 모인 300여 명의 사람들은 그의 이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가 도둑이고 누가 바보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고 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프레시안

지병으로 대외 활동을 자제해 오던 조세희 작가가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섰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마들연구소의 '명사 초청 특강'의 네 번째 강사로 나선 것.

그는 지난달 있었던 '난쏘공 30주년 기념 낭독회' 이후 며칠을 앓았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1시간여 진행된 강연에서 때로 뛰는 가슴을 잡으며 지난 역사와 오늘의 우리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


▲ 조세희 작가는 "우리는 밀림에 있다"고 했다. ⓒ프레시안

군부 독재는 지나갔다. 거대한 포클레인을 앞세워 때려 부수고, 각목을 든 깡패들을 동원해 사람들을 밀어내는 시대는 적어도 "옛 일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독재에 맞서 많은 이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도 조세희 작가는 "우리는 밀림에 있다"고 했다.

"앞선 세 세대가 그토록 열심히 일했지만 이 조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는 못 됐다. 어른들이 세계 최장시간 중노동을 하며 이 나라를 만들어 왔다. 그랬으면 우리는 지금쯤 낙원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아주 슬픈 시대에 왔다."

단지 최근의 경제 위기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조세희 작가는 손목시계를 사람들에게 보이며 "선진국이 이 앞쪽에 있고 우리는 중간에 있다. 우리가 과연 동시대인일까?" 물론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은 나라"라고 덧붙였다.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 몸과 마음이 아파 못 쓰고 있다"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유는 많았다. <난쏘공> 이후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동안 그는 사진기를 들고 온갖 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는 "어떤 때는 가슴이 철렁하고 어떤 때는 가슴이 막 메어지는" 순간들을 마주했다.

현장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을 만났다. "써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못 쓰는"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참 먹고 살기가 힘이 드는 '일하는 빈민'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받아야 하는 차별이 싫어, 항상 필요한 일자리니 고용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를 어렵사리 입 밖에 꺼내도,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다.

"한 번은 집회에 갔다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한 아버지를 만났다. 3년이나 투쟁했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는데 그이가 '투쟁하는 동안 부인과도 헤어지고 어느 날 집에 가니 아이 셋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김치에 한 공기도 안 되는 밥을 나눠 먹고 있었다. 긴 투쟁 끝에 돈도 한 푼 없는데 그때 내가 어땠겠는가' 했다."


▲현장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을 만났다. "써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못 쓰는"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참 먹고 살기가 힘이 드는 '일하는 빈민'이다. ⓒ프레시안

"한국이 5%를 위한 국가가 되는 것 같아 힘이 더 든다"

중요한 시기에 가장 아픈 사람들을 두 팔 벌려 꼭 껴안지 못하고 다른 길 가는 운동도 문제지만, 그의 심장을 더 뛰게 하는 것은 "국민이 세금을 내 지어준 제일 비싼 건물에 빨간 카펫을 깔아 놓은 곳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다. 그 자신은 "늙으면 분노도 줄어든다"고 했지만,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뉴스 보지 말라 한다"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볼 때마다 얼마나 그의 가슴이 요동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공부도 많이 하고 가진 게 많은 부자들이 나라 일을 잘 볼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뽑아주면 그 부자들은 저희들 5%나 20%를 위한 정책을 편다. 나머지 80%나 95%가 죽어나가도 관심도 없다."

조세희 작가는 "지금 한국이 5%를 위한 정책을 쓰는 국가가 되는 것 같아 힘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것도 지지율 형편없이 낮은 정부가 하는 일이다. "길고 길었다는 피식민 시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군부 독재가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가 '슬픈 시대'를 살고 있는 이유다.

"지금 정신 안 차리면 한참 더 길게 길게 끌려 다녀야 한다"


▲ 그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그러나 그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오랜 시간을 들여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았다. 절대로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그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것은 저희들의 영달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국민'을 괴롭히는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 시간부터 우리 가슴에 철 기둥 하나씩을 심어 넣자"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 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참 더 길게 길게 끌려 다녀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역사에서 절대 생략은 없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절대 생략이 없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어느 날 하루아침에 훌쩍 뛰어 넘어 새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더디더라도, 누군가는 한 걸음씩 밀림을 헤쳐 나가야만 앞이 확 트인 개활지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다시 새겨졌다.

"이 징검다리를 생략하고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탐욕 정치가와 재벌, 부정 관료의 세상에서 갑자기 기가 막힌 낙원에 도착할 수는 없다. 거쳐야 할 길을 거쳐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주 많다."

"오늘의 우리는 조선시대 의병과 같다"


▲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자신의 작품 <하얀 저고리>에 대해 조세희 작가는 "<난쏘공>에 이어지는, 내가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라고 소개했다. ⓒ프레시안

이어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자신의 작품 <하얀 저고리>를 놓고 조세희 작가는 "<난쏘공>에 이어지는, 내가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라고 소개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이 땅의 옛날 의병은 한 번 죽어서는 곧바로 저 세상으로 갈 수가 없었다. 몽고군에게 죽고, 관군에게도 죽고, 중국 군대에게 죽고, 일본군에게 죽고…. 한 의병이 열 번 죽고 몇 십 번부상을 당하고 구천을 떠돌다가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얀 저고리>에 나오는 얘기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 조선시대 의병과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했다.

"우리 늙은이들은 조금 더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미래가 달려 있다."

비록 '한 번 죽는 것만으로는 저승으로 갈 수 없는' 의병의 운명을 두 어깨에 무겁게 지고 있지만, 그는 "젊은이들이 절대로 깜깜한 세상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강연을 끝낸 그는 아픈 몸이 집중을 못하게 해 정리가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빠뜨린 말이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빠뜨렸다는 것 안에 지난 20세기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기록한 남의 땅 한 운동가가 남긴 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옮기면 이렇다.

"만약 당신이 이성과 힘을 모두 가질 수 없다면 항상 이성을 택하고 힘은 적에게 주어버려라. 힘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해주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 오로지 이성뿐이다. 지배자는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성을 얻어낼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항상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정민 기자

출처: 프레시안 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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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톡데일